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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워싱턴 리뷰어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은 호세아이다. 이 왕은 선지자 호세아가 아니다


잔머리는 안된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 해야 한다.


먼저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왕이었던 베가에 대해서 살펴보자. 북 이스라엘 베가 왕 시절에는 앗수르의 세력이 강력했다. 강력했던 앗수르를 견제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아람 (수리아)와 동맹을 맺게 된다. 하지만, 이 때 형제 국가였던 유다는 이 동맹에 가입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과 유다가 전쟁을 하게 되며, 이를 알게된 앗수르가 이스라엘 왕이었던 베가를 호세아 (선지자 호세아가 아닌 북 이스라엘 마지막 왕 호세아) 통해 처단한다.



베가 왕을 처단 한 후에, 친 앗수르파였던 호세아를 북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게 된다. 하지만 친 앗수르 파였던 호세아는 앗수르를 배신하고, 애굽 (이집트)와 동맹을 맺어 앗수르를 공격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어리석은 계획이었다. 애굽은 이스라엘을 도울 정도로 강력한 나라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게된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이때 사마리아를 3년에 걸쳐 박살내버린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정치적 동맹을 계속 뒤집으며 잔머리를 굴렸던 것이다. 베가 왕은 수리아의 원조를 구했고, 이에 분노한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많은 도시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앗수르로 끌고 갔다. 호세아 왕도 처음에는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충성을 하였지만, 결국 잔머리를 굴려서, 이집트의 원조를 구했고, 그로 인해 결국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이 결과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의 포로로 끌려가게 되고, 사마리아는 앗수르로 인해서 많은 민족들의 혼혈지역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인의 역사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렇게 혼혈인이 되어 버린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비전 성경 사전에서는 이를 아래와 같이 표현하였다.

“이스라엘 왕 호세아가 앗수르 제국에 매년 바쳤던 조공을 중단하자, 살만에셀 5세는 사마리아를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사르곤 2세는 무려 2만 7천 명 이상을 사마리아로부터 강제 이주시켰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뒤집지 않은 전병 (Unflipped Pancakes)

호세아 7장 8절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전병은 쉽게 한국의 빈대떡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뒤집지 않은 전병은 밑면은 타버리고, 윗면은 익지 않게 된다. 즉, 전병의 맛을 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 칭하였다. 전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고, 강대국의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잔머리로 강대국으로부터 살아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는 마치 한쪽 면이 익지 않은 전병처럼 되어버렸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강대국의 눈치만 보면서 한쪽 면이 계속 타버리는 전병과도 같았다. 영적으로 이스라엘은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이와 같은 실수를 범한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혹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정작 심각한 상황일때에는 하나님을 먼저 찾기보다 내가 무엇인가 해보려고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신들의 모든 결정이 최고의 선택이라 여기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결정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알기에 이러한 결정이 최선이라고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었다.


호세아 8:2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그들은 자신의 결정을 하나님을 이용하면서 정당화 시켰다. 이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반응하시는 것을 보자.


호세아 8:4 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그들이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


하나님께서 너희가 내린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는 난 모르는 일이야 라고 말씀하고 계시다.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보고 계신다.


편의적 종교인 (A Convenient Religious Person)

호세아서는 사마리아의 송아지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통일 국가, 즉 다윗과 솔로몬이 왕이었을 때는 하나님을 향한 제사와 예배는 한곳에서만 이루어졌다. 그곳은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 이외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다른 장소가 없었다. 분단된 북 이스라엘에게 하나의 딜레마가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이 남 유다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북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남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까지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본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 1세는 북 이스라엘에서도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장소를 만드는데, 이때 장소와 함께 금 송아지를 같이 만든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들을 구원한 금 송아지가 여기에 있고, 이곳에서 예배하라는 편의를 제공한다.



열왕기상 12:25-33

 (25)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26)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27)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28)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29)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30)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31)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32)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33)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사마리아 금 송아지는 북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복음과 같이 여겨졌던 것이다.


북쪽에 위치한 사람들에게는 예를 들어 갈릴리 사람들에게는 북쪽에 위치한 단이 예배하기 너무 편한 위치에 있게 된것이다. 또한 세겜 지역의 사람들은 북쪽 단보다, 벧엘에 있는 금 송아지가 위치한 예배 처소가 훨씬 가깝게 된 것이다. 즉, 여로보암 1세는 편의에 따라 2개의 예배 장소를 만들었고, 그곳에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인 금 송아지를 각각 배치하였던 것이다.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려졌느니라 내 진노가 무리를 향하여 타오르나니 그들이 어느 때에야 무죄하겠느냐


내 자신, 혹은 우리 공동체를 위한 편의적 행동은 때론 진리 자체를 잊게 만드는 오류를 범하게 한다. 나에게 있어 어떠한 편의적 행동 혹은 사고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만드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믿음의 본질을 모르는 자 (One Who Does Not Know the Essence of Faith)

기독교의 사랑과 믿음은 결코 내가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에게 찾아오셔서 이를 시작하신 것이다. 성경의 어떤 인물도 이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아브라함, 모세, 바울 등 모든 믿음의 선배들은 그들이 아무 생각없을 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믿음과 사랑의 대상이 되셨다는 것이다. 이들의 실패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끌고 가셨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 모든 여정을 완성한 자도 하나님임을 잊지 말자.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나에게서 시작되는 싸움이 아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에게 찾아오셔서 시작된 싸움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이끌고 가심을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에서는 이를 아래와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위의 포스팅은 한몸교회 이수용 목사의 설교에 대한 나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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