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작성자 사진워싱턴 리뷰어

풍성한 삶의 기초 네번째 만남은 하나님 사랑하기라는 큰 주제 가운데, 네가지의 작은 소제목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하나님 사랑하기



1. 사랑으로 드리는 예배


빨리 빨리라는 것은 한국의 대표적인 브랜드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식생활에서도 빠르고 간편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선호하게 되었다. 건강도 어떻게든 운동과 식습관이라는 어려운 과정들을 피하고, 손쉽고 빠르게 결과를 볼 수 있는 약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다.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의 책에는 한국 사람들은 파리에 와서 관광을 뒤통수로 한다는 표현을 하였다. 멋진 박물관 안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녀왔다는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 셀피를 찍는데 더 바쁘다.



아마도 우리의 인생을 잘 돌아보면 가장 중요한 핵심은 빠지고, 정작 불필요한 부분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과연 어떨까? 예술 작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박물관의 모든 작품들을 경외로운 마음으로 감상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 작품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을 박물관에 1시간 동안 억지로 있게 한다면, 정말 고초가 따로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이와 같은 이치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때는 1분 1초가 아까울 것이다. 더 많은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길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이러한 사랑이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하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정확히 이해할 때에만 가능하다. 즉, 사랑으로 드리는 예배는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알아가느냐에 따라서 그 예배의 심오함이 결정된다. 이러한 예술의 세계도 깊이가 있지만, 이 모든 우주와 나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볼때의 심오함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자녀된 자로서의 특권이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분명 예배를 더 기쁘고, 진지하게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예배의 축복은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 춤추며 뛸 수 있다는 것이다.


대상15:29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 다윗 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



우리는 간혹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사인이나 감동을 받으면 그때가서 하나님을 믿겠다 라는 말을 듣곤 한다. 하지만 이 말을 곰곰히 다시 생각해보자. 알지도 못하고, 그리고 보지도 못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내가 맞선을 보려고 멀리 떨어져 있는 외국 사람을 사랑하려고 해도, 그를 혹은 그녀를 알아야지 사랑할 수 있다. 풍성한 삶의 기초 4번째 만남은 하나님 사랑하기 이다.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그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 세 가지 형태의 예배


예배를 영어로는 Service라고 한다. 서비스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바로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이 생각날 것이다. 예배를 Watching(관람) 혹은 Meditating(명상)이라고 하지 않고 서비스라고 정의한 것은 우리가 예배 중에 하나님께 반응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찬양이 될 수도 있고, 말씀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다. 이러한 반응은 예배의 성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한국의 전통적 예배는 엄중한 분위기였다. 반면에 찬양이 흥해서, 소리 높여 뛰는 예배도 있다. 어떠한 예배 형태에 관계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 바로 서비스, 즉 예배이다.


예배를 세가지 형태로 나눈다면 개인의 찬미, 공동체적인 예배, 그리고 삶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찬미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뒷동네를 걷다가 조그맣게 핀 꽃에 감동하여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해가 질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만일 이러한 개인의 찬미가 어렵다면,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해서일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인생의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모두 우연이라고 치부할것인지, 아니면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것인지 분명히 정해진 상태라면, 분명 개인의 찬미는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기 마련이다.


공동체적인 예배는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예배이다. 이 예배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은혜이다. 또한 우리가 이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형태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와 같이 옆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지체들과는 수평적인 관계를 포함하기도 한다. 개인의 찬미와는 다른 공동체 가운데의 찬미는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가르쳐준다. 또한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주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노력들을 예배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나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여, 다른 지체를 더 사랑하게도 한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로 드리는 예배이다.



롬12:1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는 결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예배이다. 주방에서 음식을 요리할 때 찬양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것이 예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주방에서 요리하는 것 모두가 예배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마음의 방향성이 그리스도를 향해 있는지가 예배가 아닌가 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현장과 상황을 예배의 장소로 바꿀 수 있다. 마치 가수가 콘서트를 하기 위해서 특별한 장소에 찾지 않아도, 아무 곳에서나 노래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풍성한 삶은 바로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인격적인 관계, 곧 살아있는 예배에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 김형국 목사



살아있는 예배, 즉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3.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


당신은 하나님께 기도를 몇 분 정도 하나요? 초등학생 수준의 질문이지만,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단순 숫자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질문이 아닐 수도 있다. 연애를 시작했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얼마동안 손을 잡나요? 답은 오랜 시간 동안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 즉, 시간이 포커스 되기보다는 상대방이 누구냐에 포커스를 한 질문이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누구에게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분이 어떤 분인지 기억하면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가 가능하다.



빌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여러분의 마음과 생각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한다. 자신의 정성과 노력으로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실거라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분을 감동시켜서 무엇을 얻어낼 필요가 없다. 이미 그분은 자신의 모든 것,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거저 넘겨주셨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이 우리의 정성과 노력의 분량을 보고 무엇인가를 응답해주고, 안해주고 하지는 않으신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기억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하나님 앞에서 땡깡 부리는 것과 같다.



빌립보서 4장 6절에는 하나님께 기도할때 우리가 마땅히 바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적혀있다. 본문은 우리의 기도가 바로 응답된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하나님의 평화가 나의 마음, 즉 감정과 나의 생각, 나의 세계관을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단순히 지켜주신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주신다고 하였다. A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아뢰면 A의 응답이 아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결국 우리가 무엇을 진짜 원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A를 구하면 그보다 더 큰 B를 주신다는 것이다. 혹은 자신은 정말 A가 필요한데, 하나님이 생각하셨을때는 A보다 B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때 하나님께 응답을 받아내려는 의도에만 포커스하면 그 분 자체를 놓치기 아주 십상이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을 교육하려고 할 때도 있다. 하나님은 지금 내 상황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지 이 일이 해결되는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이는 빌립보소 4:6에 나오는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김형국 목사는 기도를 친교 기도와 사역 기도로 나눈다고 한다. 친교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드리는 기도이다. 이러한 기도의 형태는 찬양이 될 수도 있고, 말씀 묵상을 통한 기도일수도 있다. 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기도이며, 이때에는 인격적 관계에만 포커스를 둔다. 반면 사역 기도는 하나님께 사역에 대한 기도를 하는 것이다. 주위의 아픈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한 기도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어떤 분인지에 따라서 더 깊은 사랑의 기도가 나올 수도 있고, 단순히 5분안에 끝날수도 있는 형식적인 기도가 될 수 있다. 기도하는 시간의 분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대상이 누군지에 대한 인식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후에는 하루 종일 연애하듯이 손을 잡아도 시간 가는줄 모르기 때문이다.




4. 사랑으로 드리는 순종


순종이라는 단어는 강압적인 억양으로 종종 우리 대화 가운데 사용된다. 즉,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짓눌리거나, 다른 사람 혹은 권위로부터 무엇인가를 강요당한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순종이라는 것을 자유 의지를 가지고 한다면 그 느낌이 완전 달라질 것이다. 성경은 순종을 믿는 자들의 특권이라고 말하고 있다.


요14:21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성경에서의 계명은 원칙적으로 강압적인 순종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희생하셨지만, 우리에게 강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지 않으셨다. 그 분은 우리가 진리를 거부할 자유의지 마저 허락해 주셨다. 이는 우리를 사랑하기에 붕어빵처럼 우리는 똑같이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이러한 완전한 사랑에 의한 자발적인 순종이 아닌 경우, 물에 술탄듯, 술에 물탄듯 액면 그대로의 계명에만 포커스를 할때에는 이를 강압적인 순종의 요구라 해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자율적 순종으로 계명을 받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순종에는 방해물이 존재하는데, 바로 이것은 돈이다. 돈은 예수님께서 자신과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존재라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다.


마6: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돈은 우리에게 자기 존중감과 정체감, 그리고 기쁨과 안락함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느낌과 감정은 돈 자체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모으거나, 사용할 때 우리가 느껴지는 감정에 비롯된다. 미국은 기축통화를 가진 나라이며, 원하면 원할때마다 달러를 찍어낼 수 있다. 그러면 존중감과 정체감, 기쁨을 찍어낸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 느낌과 감정을 주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가능하다. 돈은 그로 인해서 유사 하나님이라 불리울 뿐이다.



그러므로 돈에 대한 가치관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관과 연결이 깊이 되어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 뿐만 아니라, 나의 지갑의 주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이 포스팅은 김형국 목사의 풍성한 삶의 기초 (비아토르)의 책과 이수용 목사의 일대일 제자 양육을 참조하였음을 알려드린다.



다음은 다섯번째 만남 - 참된 자기 사랑에 대해서이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