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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워싱턴 리뷰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도전들이 다가온다. 육체의 욕망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모습으로 유혹해온다. 반면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로 의지적으로 결단한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살도록 인도해준다. 또한 우리의 자연스러운 육체적인 욕구와 죄악된 욕망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성령을 따라 사는 삶


1. 부인해야 할 것과 긍정해야 할 것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부인해야할 육체적인 욕망은 한계선을 잘 구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성은 아름답고 놀라울 정도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한계선을 넘는 순간 순식간에 육체의 욕망으로 분류되어 버린다. 성 뿐만 아니라, 이전 장에서도 다룬 유사 하나님인 돈도 마찬가지이다. 돈은 인간의 생활 수단에서 꼭 있어야 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한계선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부터는 더 이상 돈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 버린다. 



이 과정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은 잘못된 비교의식과 열등감이다. 우리 주변에는 더 능력있고 더 좋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때 우리의 육체적인 욕망은 이를 열등감으로 표현하거나 잘못된 비교의식으로 표현되어진다. 육체적인 욕망 가운데에는 나쁜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게으름이다. 성경에서는 게으름에 대해서도 엄격히 다루고 있다. 이러한 것들에 이미 자연스럽게 노출되어 있는 우리는 무엇이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가치관인지 잘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의 생각과 행동 중 어떠한 부분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인지 죄된 육체의 욕망인지 하루 동안 적어보는 것도 좋은 첫시작이 될 것이다. 



서커스 단의 코끼리는 어렸을 때부터 발목을 밧줄에 연결하여서 말뚝에 고정시켜 놓는다. 어린 코끼리는 물론 발목에 묶인 밧줄로 인해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 하지만, 이렇게 각인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어른이 된 코끼리 역시 발목에 묶인 밧줄로 인해서 움직일 수 없다고 자기의 생각 안에 갇혀 버린다. 이것이 죄의 속성이다. 우리는 죄된 육체의 욕망의 생각을 지레짐작해버린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우리에게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갈5:16 "내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NIV의 표현으로는 "live by the spirit"이라고 하였다. 성령님과 동행하며 살다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부인해야 할 것들은 부인해야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옛모습을 부인하며, 성령님을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모습은 나와 성령님의 인격적인 관계로 표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이 하시는 열매들은 우리가 막으려고 한다고 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지금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죄된 육체의 욕망들은 무엇들이 있나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으며 이제부터 반응할 것인지 생각해보자. 



2.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


성령은 사람들 안을 들락날락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은 들어오면 영원히 내안에 거하는 것이다. 나와 끝까지 동행하는 삶을 산다. 내 안에 한번 오신 성령은 절대 내안에서 떠나가지 않는다. 성령사역중 중요한 부분이다. 죄를 지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미신들은 접신을 할경우 상태의 변화가 확 드러나는데, 우리는 성령을 받았을때 항상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미신의 경우, 그 신이 내 안에 들어와서 멀티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왔어도 느끼지를 못하는 이유는 성령님은 다중 인격체로 우리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성격, 체질등 모든 나의 것을 사용해서 우리와 하나가 되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살 수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고린도교회였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지만 엄청나게 서로 싸운다. 그런 사람들에게 대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죄를 짓고, 거짓말을 하며,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너희에게 성령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런 상황에서도 이들에게 성령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한 용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성령의 내주 (임재, 거하심)

  2. 성령 침례 (부어주심, 임하심)

  3. 성령 충만


성령의 내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그 모든 사람에게 거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성격이 괴팍하고, 죄가 아무리 많다 해도 성령은 내주한다. 그러한 이유는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어?” 라고 함부로 얘기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기질과 성격으로 인해서 나쁜 행동들이 자연스레 나올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이 더 절실히 예수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도덕적 결함과 성령의 내주와는 관계없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사도행전 8:14-17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데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그렇다면 위의 구절은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성령이 없이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한 사마리아인들의 경우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령은 성령의 내주가 아닌 성령의 침례 (부어주심, 임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도행전19:1-6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위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이미 그 당시에 제자라고 할 정도로 충성된 사람들도 성령을 모르고 있었다. 이것은 그 당시의 특징이 아니라, 요즘에도 일어나는 일이다. 즉, 성령의 내주하심을 인식하지 않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에 대한 외적인 증거이다. 이 외적인 증거를 보고 이미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도들이 안수할때 내려온 것이 아니라 이미 내주해 있었고, 성령침례를 받아서 외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방언, 예언, 병고침은 외적 증거이다.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외적 증거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 마음대로이다.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모르고 살 수는 있지만, 성령침례는 모를수가 없이 외적으로 드러난다.



사도행전 1:4-5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성령의 침례내가 사모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기다려야 한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 주권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과 같은 은사를 받기 위해서 외부적으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것은 사실 잘못된 것이다. 만일 사람의 노력으로 성령의 침례가 이루어졌다면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머무르지 않고 본인들의 노력(?)으로 성령의 침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 충만은 성화의 과정을 의미한다. 즉 내 노력, 결단과 의지가 요구되는 부분이다. 성령 침례는 내가 기쁘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감격할 수 있다. 하지만, 성령 충만은 나의 기분과 상황에 관계없이 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이며,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가야할 영적 싸움의 길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러므로 방언과 병 고침 등의 성령 침례의 은사를 가졌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 수준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어주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령 침례는 성령 충만을 걸어가는 길에서 우리에게 촉진제 역할을 한다.



이수용 목사의 표현이 이를 아주 정확하게 이야기 해주고 있다. 


"자전거 타기 (성령 충만의 길) + 뒤에서 누군가 자전거를 밀어주기 (성령 침례의 촉진제)"



성령의 임재, 성령의 침례 그리고 성령 충만을 더 자세히 알기 원한다면 아래 이수용 목사의 임재 시리즈를 추천한다.




3. 성령님과 성경


20세기에 들어 오순절 운동이 널리 퍼져나갔다. 성령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해서 다시금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면에는 다른 부작용도 함께 따라왔는데 그것은 바로 은사만 쫒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성령님을 하나의 도구로 전락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인격적으로 일하시고, 우리의 성격과 상황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로 우리는 인도하시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 분이 하신 일을 알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배워야 하며, 이와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성경을 통해서 다시 재조명해야 한다. 이렇게 성경을 통해서 객관적인 진리를 배우고, 이를 성령님과 동행함으로써 자기만의 주관적인 경험을 더하는 것이다. 사도 행전에서는 성령의 충만과 말씀이 흥왕하다라는 것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4.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따르는 새 생활


성령에 대해서 우리는 이번 만남을 통해서 깊이 알게 되었다. 이제는 성령님을 실제 생활에서 체험하는 과정이 남았다. 이러한 성령님의 체험은 기도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우리의 기도는 일방적인 통보로 끝나서는 안되고,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할수 있도록 듣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러한 연습을 꾸준히 하다보면 일상 생활에서도 성령님을 계속 인식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렇게 성령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겸손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겸손은 성령님을 램프의 지니처럼 도구로 사용하는 자가 아닌, 나의 동행자로 인식할때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더 닮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신다. 더 나아가 자기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시선을 옮기게 도와준다. 



누가복음4:18-21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성령님은 우리를 가만히 앉아 있게 하시지 않는다. 우리의 무너진 가정과 사회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신다. 그로써 이 세상에서 어떠한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다시 깨닫게 해주신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하신 일이기도 하다. 



말씀을 통해서 기준을 잡고, 성령님을 체험함으로써 주관적인 경험을 계속 늘리다보면, 이 깨진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우리의 성화의 과정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 포스팅은 김형국 목사의 풍성한 삶의 기초 (비아토르)의 책과 이수용 목사의 일대일 제자 양육을 참조하였음을 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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