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말의 의미가 퇴색해진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을까 고민해 보아야 한다. 특별히 이러한 사랑의 결단과 학습, 그리고 이를 훈련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한데, 이곳이 그리스도 공동체인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랑 전문가가 모인 곳이며, 이 사랑 전문가를 배출해내는 곳이기도 하다.
1. 공동체적 삶의 원리: 섬김의 도
이러한 사랑의 전문가들이 많이 있는 공동체,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공동체가 된다. 교회가 되기 위해서 모든 교회 공동체가 사랑의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교회는 결국 사랑의 전문가들에 의해서 계승되어졌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했을때, 열두 사도와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교회가 존재할까? 사도들과 제자들은 사랑의 전문가였다. 그들은 사랑의 전문가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운대로 했던 것 뿐이다. 그것이 사랑,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피흘려 희생하신 그리스도이다.
여기 2개의 성경 구절이 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는 것이다."
요한일서 3장 16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 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랑은 우리의 내면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거룩한 사랑의 일을 우리는 단지 흉내 내는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측은지심에서 나오는 연민의 사랑의 근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우리는 사랑을 하는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의 섬김은 바로 이러한 사랑에 근거한 섬김이 되는 것이다.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쳤다. 과연 그들이 자기 생명 마저 아끼지 않고 희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힘과 권위, 지식, 능력, 경험과 재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섬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 김형국 목사
2. 서로 복종하는 삶
복종이라는 단어는 듣기에 따라서 수동적이며, 부담스러운 느낌을 가지고 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는 리더들에게 주어지는 권위가 있다. 이 권위는 리더들을 통해서 그들이 더 많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민주주의는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처형은,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이를 동의한 결과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면, 모세는 홍해 앞에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갔었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모든 권위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가? 이것도 맞지 않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리더의 권위를 인정해주고, 그들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일에 힘쓸 수 있도록 순종해야 한다. 또한 리더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으로 섬기는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들 앞에서 겸손히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한 리더들의 역할 중에는 공동체 안에서 형제 자매들이 죄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권면하고, 무관심이 아닌 사랑으로 그들을 보듬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가 그리스도 앞에 그 분의 권위를 인정하며 복종할 때 가능하다. 마치 부부가 각자의 모습 속에서 부족한 것들에 포커스를 할 때에는 싸움만 일어나지만, 부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바라보며 나아갈때, 이러한 부족함이 사랑으로 덮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최종 권위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에서 최고 리더로 자리 잡을 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복종하는 삶을 우리는 실천할 수 있게 된다.
3. 용서와 용납
한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한도는 분명 정해져 있다. 보통 10명, 많게는 20-30명이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수가 아닌가 싶다.
요한복음13:34-35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서로 사랑하라는 대상은 이름없는 대중이 아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직접적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C.S Lewis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도 잘 묘사되어 있는데, 우리는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힘들다. 매번 싸우며 얼굴 보기 싫은 가족 구성원은 사랑하기 어렵다. 하지만, 저 멀리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으며 나와 교감이 없는 사람들을 사랑할때는 뭔가 사랑한다는 느낌이 생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이 거리가 있다. 두리뭉실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구체적인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선택한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내 주위에서 보기 싫은 것 다 보며, 내가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사랑하고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비유는 우리에게 용서와 용납의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만 달란트를 빚진자는 얼마를 빚진 것인가? 1 달란트가 보통 일꾼의 15년 동안의 품삯이기에 만 달란트란 15만년의 품삯이다. 즉, 갚지 못하는 금액이다. 반면 1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므로 100 데나리온은 100일치 품삯에 해당된다. 성경에서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가 주인에게 감사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중,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고, 감옥에 넣는 이야기가 있다. 결국 이 사람은 만 달란트 빚진 주인에 의해서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얼마나 빚진 지 계산하지 않고 나에게 빚진 자들과 계산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빚은 바로 죽음이었다. 죽을 수밖에 없던 나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즉 만 달란트를 이미 우리는 탕감받은 체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에게 보이는 백 데나리온을 못 잊고 있는 것이다.
"누군거룰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그들을 마음에 품고 그 사람과 동거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생갈날 때마다 화가 불끈불끈 솟아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같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늘 그 사람을 생각하고 묵상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이 미원하는 사람들에게 늘 에너지를 빼앗기기 때문에, 좋은일에 써야할 에너지를 분노를 터뜨리는데 소진합니다." - 김형국 목사
4. 은사로 공동체 세우기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공동체 가운데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자신의 은사를 이용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다. 즉 남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다. 은사는 때로는 개발되기도 하기 때문에, 현재 자신이 잘하는 것만 보지 말고, 어떠한 가능성이 있는지 이것 저것 도전해 보는 것도 좋다. 이렇게 공동체 가운데에서 자신의 은사로 남들에게 유익을 드러낼때, 공동체는 사랑으로 맺어져 간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잘 하는 일, 두가지가 잘 맞물려서 공동체를 세워갈때, 이러한 공동체에서는 성령의 열매들이 맺어지기 시작한다.
이 포스팅은 김형국 목사의 풍성한 삶의 기초 (비아토르)의 책과 이수용 목사의 일대일 제자 양육을 참조하였음을 알려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