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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워싱턴 리뷰어

신앙생활에서 낮은 자존감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했다. 죽음으로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깊이를 깨달을수록 우리의 자존감은 높아지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성경에서 낮은 자존감을 가진 지파가 있었는데, 바로 에브라임 지파였다.



(The Believer’s Obstacle – Low Self Esteem)


13:1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13:1

When Ephraim spoke, there was trembling He exalted himself in Israel, But through Baal he did wrong and died.


호세아서에 나오는 에브라임은 보통 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호세아 13장 1절의 에브라임은 12지파 중 하나인 에브라임 지파를 의미한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이며,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할 때 이미 에브라임이 첫째 아들인 므낫세보다 흥왕할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 백성 들 사이에서 특권적이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여호수아가 바로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었다. 여호수아와 사사 시대에서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였던 실로가 에브라임 지파 땅 안에 있었다는 것은 지파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북 이스라엘의 첫 왕인 여로보암도 에브라임 지파였다. 한국에서도 대통령이 어떤 지역에서 출마했을 때, 그 지역의 사람들은 기뻐하며 이를 응원한다. 그렇다면 에브라임 지파는 어땠을까? 당연히 다른 지파보다 우월하다는 것에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에브라임은 자기 스스로를 높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말을 할 때 자신을 스스로 높여서 얘기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낮은 자존감 (low self esteem)이다. 즉, 다른 사람이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높임으로써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포장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비교 의식을 통해 자신은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낮은 자존감은 보통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하지만,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많은 경우 영적인 부분과 연관이 있다. 에브라임이 바로 이 두번째 경우이다. 에브라임은 본래 자신들이 왕위를 계승할 지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위를 계승할 지파는 다윗의 자손 유다 지파, 즉 남 유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브라임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힘과 부를 가진 에브라임에게 말하고 있다. 너의 가진 부와 힘으로 자신이 복받고 있는 것이라 말하는 것은 죄라고…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더 간과하고 넘어가지 말하야 할 사실이 있다. 내가 남과 비교하여 가지지 못한 부로 말미암아 나는 복받지 못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 역시 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낮은 자존감을 고치시는 하나님

호세아 13장은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오라고 계속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호세아 13:14에서부터 경고가 아닌 구원의 메세지로 갑자기 변한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경우에도 반전을 허락하신다. 이렇게 반전을 이루시는 이유는 결국 낮은 자존감을 가진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기 때문이다.

 

13:14

내가 이스라엘을 스올의 손아귀에서 건져내리라.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빼내리라. 죽음아, 네가 퍼뜨린 염병은 어찌 되었느냐? 스올아! 네가 쏜 독침은 어찌 되었느냐?

 

13:14

Shall I ransom them from the power of Sheol? Shall I redeem them from death? O Death, where are your thorns? O Sheol, where is your sting? Compassion will be hidden from My sight.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건지시고, 사망에서 구속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반전을 일으키신다. 모세의 경우, 자신의 백성을 학대하는 관리인을 죽이고 사막으로 도망간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반전을 일으키시어 출애굽을 명한다. 출애굽은 또 어떠한가? 수많은 사건들로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풀려난다 하지만, 또 다시 홍해라는 반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또 그에 대한 반전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은 반전의 선수이시다. 결코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지 않으신다. 성경은 정말 반전의 스토리를 엮은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왜 그런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늘 그러하셨듯이 우리의 인생에도 역전을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반전이 일어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반전을 기다리고 기다린다. 하지만, 마지막 그 순간에도 나에게 반전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하나? “왜 슬픈 예감은 한번도 틀린 적이 없나” 마치 대중 가요 가사처럼 나에게 반전이 없을 수 있다. 성경에는 분명 하나님의 반전을 경험한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런데, 왜 내 스토리는 아무런 반전이 없는것인가? 그렇다. 나에게 아무런 반전이 없을 수 있다.


성경에도 아무런 반전없이 마무리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바로 사도 바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회심한 사도 바울은 그의 모든 인생을 예수에게 걸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일생은 참수형으로 마치게 되었다. 그에게는 반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바울이 마지막 죽기 전 로마에 있었을 때, 분명 바울을 위해 기도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반전을 기대했을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문을 열어주었던 그 반전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호세아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반전을 일으키신다고 하셨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말하고 사망에게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그것이 반전이 없는 삶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렇다면 14절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바울은 반전없는 죽음을 부활과 연결시킨다.


15:53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바로 호세아서 13:14를 인용한 것이다. 사망을 향해 크게 외친 것이다. 그래 너의 승리가 아니다. 사망아 너가 나를 쏘아도 그것은 정말 승리가 아니다. 이렇게 바울은 말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할 때 사도 요한은 분명 반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예수를 구하고, 로마 병사들을 싹 쓸어버릴 반전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죽음 마저도 이긴, 사망의 쏘는 것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죽음 뒤에 있을 승리를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향해 당차게 전진할 수 있는 것은 용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죽음 뒤에 있을 반전을 볼 수 있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포스팅은 한몸 교회 이수용 목사의 설교를 나의 버전으로 재해석했음을 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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